'제2 론스타 사태' 언제든 온다…국제중재 역량부터 키워라 [최진석의 Law Street]

입력 2022-09-13 17:45   수정 2022-09-14 00:17

한국 정부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10년 동안 다툰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결과가 지난달 31일 나왔다. 2012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첫 ISDS다. 심리를 맡은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는 론스타 측이 요구한 배상액 6조원(46억8000만달러)의 일부인 약 2900억원(2억1650만달러·이자 제외)을 배상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려한 것보다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정부가 판정 취소 신청을 적극 검토하고 있어 ‘론스타 분쟁 2라운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론스타 사건을 계기로 국제중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국제중재는 서로 다른 법과 제도를 가진 국제 상거래 분쟁 당사자들이 중립적인 중재인을 선임해 판정받는 절차로 ‘대체적 분쟁해결수단(ADR)’으로도 불린다. 재판보다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어 경제적인 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프랑스, 미국, 싱가포르, 홍콩이 국제중재 선진국으로 꼽힌다. 국제중재 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아비트레이션뉴스에 따르면 세계 13개 국제중재기관 접수 건수는 2012년 4521건에서 2020년 7419건으로 64.1% 늘었다. 글로벌디스퓨츠레지스터에 따르면 글로벌 국제중재 시장 규모는 2018년 기준 118조원(860억달러)이다. 현재는 137조원(1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높은 세계무역순위(8위) 등 경제적 위상에 비해 국제중재 경쟁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이 ‘아시아 중재 허브’로 거듭나기 위해선 정부가 중재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법조계도 전문가 양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뉴욕·워싱턴 협약으로 ‘기틀’
국제중재의 역사는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 간 상거래가 있는 곳엔 반드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글로벌 무역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선 상인 모임인 길드가 분쟁을 조정했다.


글로벌 국제중재 시대가 본격적인 막을 올린 것은 1950년대다. 국제중재는 크게 국제상사중재와 투자조약중재로 구분된다. 국제상사중재는 국제 상거래 당사자가 거래상 분쟁을 국가재판소의 재판이 아니라 중재인의 결정에 따르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중재인의 결정은 1958년 뉴욕협약(외국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유엔 협약)에 의해 외국에서도 효력이 보장된다.

투자조약중재(투자자중재)는 투자자와 투자유치국 사이에 발생한 분쟁을 중재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이다. 투자자 소속국과 투자 상대방인 국가 사이의 투자조약(BIT)을 근거로 진행한다. 1966년에 발효된 워싱턴협약이 근거다. 이 협약에 따라 세계은행 산하에 중재절차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ICSID가 설립됐다. 뉴욕협약과 워싱턴협약 가입국은 각각 160여 개국에 이른다.
중립성·비밀유지 등 장점 많아
국제중재의 장점은 ‘집행의 용이성’ ‘중립성’ ‘비밀유지’ ‘신속성’ 등이다. 민사소송에선 법적으로 이미 설계된 절차 내에서 사실 및 법률에 관한 주장만 할 수 있다. 국제중재에선 절차와 규칙 등 세부사항까지 당사자들이 직접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면을 교환할 횟수, 순서, 증거 제출 방식, 구두 심리기간, 변론순서 등도 당사자들 합의에 따른다.

일반적으로 3인 중재인으로 구성된 중재판정부가 심리를 진행한다. 각 당사자가 1명씩 중재인을 선임하고, 이들 2명이 의장 중재인을 선임한다. 중재인은 법원의 판사처럼 해당 사건에 관한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국제중재는 단심제로 이뤄지기 때문에 3심에 걸쳐 최종 결론을 도출하는 소송에 비해 빠른 결론 도출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소송은 최종 판결까지 3~4년이 걸리지만 국제중재는 1년~1년6개월 정도면 최종 결론이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분쟁 자료가 비밀로 유지되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분쟁 상황이 일반에 공개될 우려도 적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제중재 절차가 10년 넘게 이어지는 등 예상보다 오래 걸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제상업회의소(ICC)에 따르면 중재판정문을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개월(2020년 기준) 정도다. 기업 간 대규모 글로벌 인수합병(M&A) 등이 활발해지면서 분쟁 규모도 크고 복잡해진 데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 역시 민감한 사안일수록 재판이 오래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국제중재가 여전히 빠르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대형 중재 사건 증가세
한국 정부는 최근 결론이 난 론스타 사건 외에 또 다른 조 단위 ISDS 사건을 진행 중이다.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과 메이슨캐피털의 ISDS다. 이들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봤다며 2018년 중재를 신청했다. 엘리엇과 메이슨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가 국민연금공단을 움직였고, 국민연금이 삼성그룹 오너 일가에 유리한 합병 비율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엘리엇은 7억7000만달러(약 1조원)가량을, 메이슨은 2억달러(약 270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가운데 엘리엇 사건은 마무리 단계라 곧 결론이 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사건은 법무법인 광장 국제중재팀이 정부 측을 대리하고 있다.

스위스 기업 쉰들러가 제기한 ISDS도 있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가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부당하게 유상증자와 전환사채를 발행했는데, 한국 금융당국이 이를 방치했다며 2018년 2600억원(1억9000만달러) 규모의 ISDS를 제기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론스타 사건을 포함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 사건은 총 10건이다. 이 중 아직 결론이 안 난 중재는 6건이다. 결론이 난 사건 중 ‘다야니 사건’ 같은 패소 사례도 있다. 이란 가전회사인 엔텍합을 소유한 다야니 가문은 2010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자금 조달 계획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으로부터 계약을 해지당했다. 이에 다야니는 계약 과정에서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ISDS를 제기했고, 중재판정부는 2018년 “한국 정부가 730억원을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정부의 ISDS 패소 첫 사례다.

국가 간 투자가 활발해질수록 세계적으로 ISDS를 이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UNCTAD에 따르면 2021년까지 전 세계에서 제기된 ISDS는 1190건이다. 지난해 68건의 새로운 ISDS가 접수됐다. 사건의 덩치도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ISDS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은 2005년 사이프러스의 헐리엔터프라이즈 등 러시아 석유기업 유코스의 주주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제기한 157조원(1140억달러) 규모의 ISDS다. 2005년 제기 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2003년 자국 석유회사 유코스의 회장이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사기와 탈세 혐의로 체포했다. 호도르콥스키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유코스 역시 거액의 세금을 물게 돼 파산했다. 당시 유코스의 주주이던 헐리엔터프라이즈는 이를 “국가의 부당한 체포에 의한 손해”로 주장했다. 호도르콥스키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이라는 이유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기업 간 국제중재 사건 중에선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2대 주주이자 재무적 투자자(FI)인 어피니티컨소시엄 간 2조5000억원 규모의 ICC 중재가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어피니티컨소시엄이 2012년 교보생명 지분을 확보한 뒤 신 회장과 풋옵션(일정 가격에 지분을 되팔 권리) 행사와 가격 등을 놓고 빚어온 갈등이 씨앗이 됐다. ICC 중재판정부는 작년 9월 어피니티컨소시엄이 풋옵션 권리를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신 회장 측이 풋옵션 가격으로 책정된 40만9000원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판정했다. 어피니티컨소시엄은 현재 풋옵션 실행에 관한 강제력을 부여받기 위해 ICC에 2차 중재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이 사건의 경우 법무법인 광장이 교보생명을, 법무법인 태평양과 피터앤김이 어피니티 측을 대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우조선해양과 일본 인펙스사의 호주 법인 간 1조2000억원 규모 ICC 중재 사건이 제기됐다. 지난달 인펙스는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부유식 원유 해상 생산설비(FPSO) 공정이 지연됐다며 ICC에 9억7000만달러(약 1조34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중재를 신청했다. FPSO는 유전에서 뽑아 올린 원유를 해상에서 정제하는 설비다. 인펙스는 대우조선해양이 2017년 호주 해상에 설치한 FPSO 생산 준비가 지연됐고, 설비에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우조선해양 측은 계약상 완료일 내에 출항해 생산 준비를 마쳤고, 계약 이행 중에 발생한 내용 변경과 추가 비용은 인펙스의 승인 변경을 받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 사건에선 광장과 김앤장이 각각 대우조선해양과 인펙스사의 대리를 맡아 맞붙었다.
국제중재 시장의 ‘마이너’ 한국
국제중재 시장에서 영국 런던국제중재법원(LCIA), 프랑스 ICC, 미국 ICSID 등이 3대 중재기관으로 꼽힌다. 아시아에선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가 두드러진다. 한국은 국제중재 부문에서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중재실무회가 한국의 중재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KCAB)으로부터 의뢰받고 지난 2월 국제중재를 많이 활용하는 국내 27개 기업의 해외 법무 담당 팀장급 사내변호사를 심층 인터뷰한 결과 ICC, SIAC, LCIA 순으로 국제중재기관을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재지로도 싱가포르와 영국 런던을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재신청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KCAB에 접수된 새로운 중재사건이 처음으로 500건을 넘어섰다. 다만 국제중재 건수는 50건으로 전년 대비(69건) 줄었다. 론스타 국제중재 사건 등을 맡아온 김준우 법무법인 태평양 국제중재팀 변호사는 “싱가포르의 경우 정부가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중재 심리시설인 ‘맥스웰 체임버스’를 만들고, 적극적인 홍보를 해왔다”며 “싱가포르는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가장 선도적인 국제중재지로 거듭났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국제중재 경험과 역량을 두루 갖춘 중재인을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중재 전문지인 영국 글로벌 아비트레이션 리뷰(GAR)가 매년 발표하는 국제중재 분야 ‘세계 30대 로펌(GAR 30)’ 가운데 한국 로펌은 피터앤김 한 곳뿐이다. 세계 100대 로펌으로 범위를 확대해도 김앤장법률사무소와 법무법인 광장, 태평양, 세종 정도다. 임성우 법무법인 광장 국제중재팀 변호사는 “ICC, ICSID의 국제중재 사건에서 중재인을 맡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변호사는 20~30명 정도에 불과하다”며 “젊고 우수한 변호사들이 국제중재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정부와 로펌이 보다 체계적인 지원 방안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대응 역량 강화 필요 ‘한목소리’
정부도 ‘제2 론스타 사건’ 재발 방지 및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조직 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무부는 2020년 8월 국제분쟁대응과를 신설해 ISDS에 대응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고, 젊은 한국 변호사 위주로 구성돼 경험도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다. 임기제 공무원들로 이뤄진 조직이다 보니 능력 있는 전문가가 장기간 근무하기도 쉽지 않다. 현재 한국 정부를 상대로 진행 중인 ISDS는 총 6건이다. 법무부도 이 점을 인식하고 국제분쟁대응과 확대 개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 때도 “국제분쟁실이나 국제분쟁국 수준으로 조직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김갑유 피터앤김 대표변호사는 “한국은 5~6년 전만 해도 국제중재 시장에서 요즘처럼 주목받지 못했다”며 “한 국가의 국제중재 발전은 해당 국가의 국제적 경쟁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만큼 한국도 무역 규모와 지정학적 위치 등을 활용해 국제중재 위상 강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진석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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